시리즈로 돌아가기
169화: -


봄이 막 제 문턱을 넘어서려는 때에, 낮의 온기가 이른 저녁 공기 속에 머물러 있었고, 하늘이 느릿하게 기울어져 가는 때에, 당신은 익숙하고도 그리운 이에게서 온 소포를 받는다. 눈대중으로 미루어 보아 10인치 남짓이 되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종이 상자가 당신의 두 팔에 적당히 안긴다.


낯설지 않은 일이다. 지금 당신이 걸치고 있는 코트를 시작으로, 그는 제 소식을 전할 때면 반드시 크고 작은 선물을 함께 보내곤 한다. 여기에 구태여, 라는 물음이 들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이겠으나, 사람의 마음이란건 참으로 묘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법이기에 당신은 이 일렁임을 외면하지 않는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감정들을 퍽 기꺼워하며, 당신은 상자를 연다.


상자 안에는 사탕 봉지 몇 개가 어떤 균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완충재로 꼼꼼히 감싸인 채 놓여있다. 그 아래로 누르스름한 표지의 책 한 권, 갈색 봉투 하나, 그리고 손바닥을 겨우 가릴 만한 길이의 흰 봉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은 곧장 그 흰 봉투를 알아본다.


어떤 구겨짐도 없는 새하얀 봉투는 당신이 언젠가 형제의 손을 따라 방문했던 양장점의 선반 위, 잘 다려져 각이 잡힌 셔츠들을 닮아 있다. 봉투 귀퉁이에는 정갈한 필기체로 '사랑하는 에밀(Dearest Emil)' 이라 적혀 있었는데, 미처 마르지 못한 잉크가 종이에 번진 자국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그것이 인쇄된 글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곧이어 당신은 커터칼을 들어 봉투가 망가지지 않도록 모서리를 조심스레 잘라낸다. 종이가 날에 베여 사각이는 소리와 함께, 언젠가 레터나이프를 쓰던 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봉투만큼이나 깔끔히 접힌 두 장의 편지지 뒷면으로 펜 자국이 희끗하게 비쳐 보인다. 그 자국을 바라보는 당신의 가슴속에서 다시 무언가가 천천히 부푸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은 젊은 날, 그와의 점심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의 기대와 같은 것이다. 만물이 흘러가며, 사람은 잃어간다고 한다지만 이 기대만큼은 끝내 앗아가지 못하리라.


펜이 남긴 작은 요철들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당신은 한 풍경을 떠올린다. 먼 곳에서 다가오던 형제의 그림자를. 가까워지며 점차 또렷해지는 음영을. 드리운 그늘이 마침내 편지지 위에 내려앉자 당신은 숨을 고르고, 그 단정한 글씨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에밀,


네게 편지를 쓸 때면 늘 첫 문장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게 돼.  너도 알다시피 나는 평생을 펜과 함께 살아왔고, 글을 쓰는 일은 이제 내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런데도 에밀, 네게 닿을 말이라면 무엇 하나 함부로 고르고 싶지 않아서, 아무리 짧은 안부 한 줄에도 생각이 길어지고 말아. 네가 이 편지를 한 번 읽고 그냥 넘기거나 접어두지는 않을 거라는 걸, 형은 알고 있거든.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네가 보내온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어.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은 지도 어느새 몇 해가 흘렀구나. 물론 우리는 전화로 목소리를 나누는 일이 훨씬 잦지. 그것도 즐겁지만, 종이 위에서 만나는 일에는 분명 전화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 돌이켜 보면 네 편지가 오던 날도, 내가 네게 보낼 편지를 쓰던 날도 언제나 특별했으니까. 이제 우리 사이에서 편지는 그런 특별함을 전하는 매개가 된 것 같아. 그래서 네게 전할 ‘특별한’ 문장을 고르는 일이 내겐 가벼울 수가 없어. 형으로서 네게 가장 좋은 것만 내밀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고. 내가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고 걱정하지는 마. 그 모든 고민과 첨삭의 시간조차 내겐 행복하니까.


네게 정말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지만, 아직 포장해두기로 하자. 어릴 적 기억나? 크리스마스 이브 밤이면 어머니와 아버지, 혹은 고모님과 고모부님이 거실 한구석 트리 아래에 색색의 포장지로 곱게 싼 선물들을 미리 놓아두시곤 했어. 옅게 반짝이는 전구빛에 물든 그 트리 아래에 말야. 그러면 너는 꼭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계단을 내려가 거실을 엿보고 돌아와서는, 선물들이 어떻게 포장돼 있었는지, 크기는 얼마나 됐는지 내게 모조리 속삭여주었지. 우리는 그렇게 기대에 잔뜩 부풀어 한참을 재잘거리다 잠들곤 했어.


나는 무언가를 기대할 때마다, 그때를 생각하곤 해. 기대는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우리는 그 끝이 늘 기쁨으로 맺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 만큼 살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기대라는 건 참 아름다운 일이야. 상처를 알면서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향해,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어두는 것. 그 안에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가장 깊은 생명력이 깃들어 있어. 너도 지금 무언가를 기대하며 지내고 있을까. 기대를 디디며 너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그곳을 떠나온 뒤로, 네 생각이 날 때면 꼭 그게 궁금해지곤 해.


이렇게 거창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야. 그러니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해. 내 이야기를 조금만 더 기다려주었으면 해. 기분 좋은 기대를 안고서 말이야. 이제 우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잖아.


당신은 잠시 편지를 내려놓고 갈색 봉투를 뒤적인다. 조금 두툼하다고 생각했던 봉투 안에서 사진 십여 장이 쏟아져 나온다. 그 사이에는 동물병원을 배경으로, 고깔모자를 반 가른 듯한 깔대기를 목에 두르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거나, 집 안을 어슬렁 돌아다니는 회색 고양이 사진이 몇 장 섞여 있다. 사진 뒷면에는 정갈한 필기체로 이름 하나가 적혀 있다. '뢰베(Loewe)'. 이것이 그가 고양이에게 붙여준 이름이리라는 것을, 당신은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정말 그다운 이름이다.


사탕은 깨지지 않고 잘 갔어? 변변찮은 것을 보내게 되어 마음이 조금 무겁네. 이번 달은 평소보다 지갑을 좀 더 열어야 할 일이 생겼거든. 지난번에 말했던 그 길고양이 말이야. 역시 눈에 밟혀서 데려오고 말았지. 이름은 뢰베라고 지었어. 독일어로 사자라는 뜻이야. 색은 전혀 사자같지 않지만, 언젠가 고양이를 곁에 두게 된다면 꼭 이런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거든. 어쨌든 이 어린 사자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지출이 생겨버렸고, 이번엔 다소 소박한 선물들을 보내게 됐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지부 사람들과 사이좋게 나눠먹었으면 해. 지부장실의 양철통이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좋겠다.


그리 멀지 않은 때에 목소리를 나눴는데도, 이렇게 다시 편지를 보낸 게 네겐 조금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싶네. 하지만 이 한 달간, 마음을 맴도는 문장들이 참 많았거든. 목소리로는 분명 다 전하지 못할 말들이라 펜을 들고 말았지. 이번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 한 권과 내가 이 무렵 겪은 일에서 비롯됐어. 최근 받은 어떤 질문 덕분에, 그 책의 내용과 나의 삶이 비로소 맞물리게 된 것 같은 흥미로운 경험을 했거든. 어쩌면 뜻밖의 책 추천사가 될지도 모르겠네. 너에겐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 편지를 읽으면서 조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재미있게 써볼게.


2주 전의 일이야. 두 달에 한 번씩, 이른 오후면 내 보호관찰을 맡은 젊은 친구가 찾아온다는 건 너도 잘 알 거야. (지금은 네게 처음 그의 이야기를 했던 때보다 훨씬 친해졌지. 술을 곁들이면 누구와든 죽마고우가 될 수 있거든) 여느 때처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가 내게 묻더구나. UGN을 등진 그날, 어떤 심정이었느냐고. 후련했는지, 고통스러웠는지, 아니면 또 다른 감상이었는지. 그 어떤 것도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다면서.


질문에 내가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봤어. 나는 오랫동안 그때의 감정을 어떤 상쾌함이라 여겨왔지. 굳게 닫혀 있던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을 때, 밖에서 불어오는 첫 바람이 긴 세월 묵혀두었던 먼지와 함께 오래된 걱정들을 쓸어내주었을 때의 기분 말이야. 그런 나는 이를 해방이라고 굳게 믿었어. 하지만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려는 순간, 어떤 문장이 내 심장을 푹 찌르고 선명해지더구나.


“이 모든 일은 너희가 계속 괴로움으로부터 달아나려 하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으로부터, 너희 영혼으로부터 달아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헤세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에서 우리의 고통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데서 온다고, 영혼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막고 더 그럴듯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제 것인 양 빌려 웅얼거리는 데서 온다고 말했지. 이전의 나는 그 말을 마음 깊이 들이지 않았어. 그렇게 기억 어딘가에서 흐릿해지도록 조용히 방치해두었지. 그랬던 만큼,  그 문장이 불현듯 선명해진 것이 이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이었다는 게 우연이라 느껴지지 않았어. '운명'이라고 느껴졌지. 내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이, 마침내 제 때를 만나 날개를 편 것처럼. 신기하지 않아?


그래. 그 시절의 나는 분명 고통스러워했어. 하지만 그 고통마저도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라는 증거라 믿었기에,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지. 그러니 그 괴로움조차 달콤하게만 느껴졌어. 하지만 그건 내 안에서 지저귀던 소리를 따르는 대신, 바깥에서 더 '논리적인' 소리를 찾아 헤맨 것에 불과했어. 온갖 곳에서 긁어모은 말들에 나를 끼워 맞추고, 글로 멋지게 다듬어진 얼굴을 덮어쓰는 것으로 나를 삼았지. 도망을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타일렀어.  


결국 전부 내 안에 있던 거야. 나는 나를 알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았지만, 정작 내 얼굴은 한 번도 제대로 매만지지 않았지. 그 허깨비 같은 반사상을 바라보며, 거울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서로를 통해서만 나를 정의하려 했던 그 끝이 어땠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어. 맞아, 정의는 밖에서 빌려올 수 없어. 그건 내 안에서, 오직 나 스스로만이 내려야 하는 일이야. 그 단순한 진실 하나를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리고 그걸 이제야 글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깊이 깨달았다는 게 기쁜 건지 씁쓸한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에밀, 진짜 나 자신으로 서기 위해 걸어가는 이 길이 내 심장을 뛰게 한다는 것만은 정말이야. 크리스마스 이브의 그 설렘을, 나는 여전히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어.


찬찬히 문장을 정리한 후에 (술이 들어가서인지 생각만큼 말이 잘 나오지는 않더라) 그 친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지. 흥미롭다는 듯 귀를 기울이다가도, 취기가 올라서인지 이따금 눈이 풀리더구나. 그래도 그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어. 배신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고, 나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관점을 존중하고 존경한다고. 그러니 이렇게 나와 시간을 보낸 것도 헛된 일은 아니었다고 말이야. 발갛게 취한 얼굴이었어도, 그 눈빛만은 정말 또렷했어. 이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도 그 얼굴이 선해. 그 눈을 마주하니, 내 진심이 그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어.


너도 책을 한두 권씩 읽어보고 있다고 했지. 내가 읽었던 책을 함께 담아 보낼게. 제일 쉽게 구할 수 있는 역본이었어. 시간이 충분했다면 내가 원서를 직접 번역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서재 안에서 먼지만 마시고 있기에는 요새 날이 너무 좋잖아. 네가 직접 읽고 느껴주었으면 하는 단락들은 큰 어긋남 없이 옮겨져 있으니, 우리는 같은 문장을 읽을 수 있을 거야. 나와 같은 것을 느끼려 애쓸 필요는 없어. 적어도 이것으로 우리는 같은 세계를 볼 테니까. 우리가 이 책에 대해 즐거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겐 큰 행운이야.


막 햇볕이 노르스름해질 때 펜을 들었는데, 어느새 날이 저물어 창가가 뿌옇게 물들었어. 스탠드를 조금 이르게 켜 두었는데, 잘한 일 같아. 이제 정말 여름이 오려나 봐. 공기에 벌써 열기가 돌고 있네. 여기도 꽤 따뜻해진 걸 보니 그쪽은 벌써 꽃이 다 지고 많이 더워졌겠다. 넌 더위를 많이 타니까 괜히 마음이 쓰이네. 물은 꼭 자주 챙겨마시고, 무리하지 마. 또 편지 쓸게.


에릭이.


편지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당신은 그가 보낸 책의 표지 위로 손을 얹는다. 손 아래 닿는 종이의 감촉이 낯설지만은 않다.


하늘이 서둘러 커튼을 걷지 않은 덕에 창 너머로 흐릿한 붉은빛이 흘러든다. 느긋이 저물어가는 노을이 두 곳을 동시에 덮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문득 깨닫는다. 지금 이 식탁 앞에도,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어딘가의 낯선 거리 위에도 똑같은 땅거미가 스며들고 있겠지. 당신은 식탁 위의 작은 조명을 켠다. 불빛은 좁고 따뜻해서, 꼭 어릴 적 형제의 손을 잡았을 때의 온기를 닮았다.  


어스름 속에서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페이지 속 가라앉아있던 활자들이 떠오른다. 그도 이 문장들을 거쳐갔을 것이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따라 당신은 나아간다. 기대를 품으며, 그가 먼저 걸어갔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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